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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her), 2014.06.25, 압구정 무비꼴라쥬




1. 갈라테이아는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다. 그런 갈라테이아를 피그말리온은 너무나도 사랑했다. 하지만 누워도 미동이 없고 살결마저 눈처럼 차가운 그녀는 그저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일 뿐이었고 그는 매일 밤 자신의 그녀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아프로디테에게 매일 간청한 피그말리온. 한결같은 그의 소원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주었고, 갈라테이아는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살결로 피그말리온을 맞이했다. 그 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나. 이렇든 저렇든 그의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2. 과거의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는 미래 사람들의 현실이 된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생각했던 미래도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통화를 할 수 있다든지, 자동차 안에서 티브이를 볼 수 있다든지. 편하게 살기 위해 꿈꿨던 기술에게 우리는 이제 잠식당한다. 게임기가 게으른 나를 운동하게 도와주고, 하루의 일정을 짜주고 일하라며 매시간 알람까지 울려준다. 나는 그렇게 하나하나 기계에 먹혀가고 결국 기계는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간다. 이젠 심심하면 가상의 인물과 대화까지 한다. 가상의 인물은 엄청나게 친절하다. 시리에게 ‘사랑’이라고 말했더니, ‘아… 그래서 저를 그렇게 지긋이 바라보셨군요. 어쩐지 심상치 않았어요.’라고 대답해줬다. 아, 반해버릴 것 같은 가상의 그대.

3. 테오도르는 아내와 이혼을 준비하는 도중에 사만다를 만났다. 귀를 살며시 핥아줄 것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 사만다는 생명이 깃들기 전의 갈라테이아처럼 살아있지 않은, 그저 컴퓨터의 운영체제에 불과했다. 메일과 뉴스를 읽어주며 테오도르의 하루를 관리해주는 기계. 테오도르의 시시껄렁한 이야기에도,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에도 친절히 대답을 해주는 사만다. 고민거리를 들어주고 이야기해주는 게 그저 사만다를 움직이게 하는 입력된 명령어 따위에 불과하더라도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만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 아파해주는구나!
도대체 무슨 하드웨어를 심어놓은 건지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사랑하게 되고, 테오도르도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테오도르의 갈라테이아가 된 사만다. 생명을 얻고 싶어하는 사만다. 가상은 현실이 되기를 원하고, 현실은 가상이 되기를 원했다. 만질 수 없는 그녀를 어떻게든 대체해보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을 안 한다. 현실에 가로막혀 낙담한 테오도르. 지쳐서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캄캄한 하늘, 네모반듯하고 빽빽이 솟아오른 건물과 반짝반짝한 불빛의 미로. 마치 전자회로 같은 이 도시에서 우리는 몸도 마음도 길을 잃었다.

4. 그러니까 어젯밤, 무비꼴라쥬에서 그녀(her)를 봤다. 그녀라는 영화의 제목과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있는 포스터만 보고서 단순한 사랑이야기인 줄 알고 영화관에 갔다가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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