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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담을 쌓았어. 조그마한 손에 빨간 벽돌을 쥔 채. 하나하나, 그리고 차곡차곡. 한층 한층 덧대어 올라가기 시작하면 옆에서 ‘잘 쌓고 있다’며 칭찬해주는 당신이 있었어. 조그마한 아이는 칭찬에 신이 나서 더욱더 열심히 담을 쌓았지. 무릎만큼 오던 담이 어느새 가슴팍까지 차오르고 머리를 넘을 때쯤. ‘이 정도면 잘 쌓았죠?’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뿔싸. 당신이 사라진 거야. 담을 쌓느라 정신이 없어서 당신을 미처 보지 못한 걸까. 


이제 ‘잘했다’며 칭찬해줄 당신이 없어. 처음에는 너무 두려워서 그만 쌓을까 생각도 했어. 그래도 한 번 쌓은 거, 끝까지 쌓아보자 하고 도전해보기로 했어. 다시 하나하나. 내 키가 큰 만큼 높이도 높아지고, 이젠 내가 두 팔을 활짝 벌려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길어졌지. 봐주는 당신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잘못 쌓아서 무너진 벽돌에 깔려보기도 했고, 남들이 뭐 이렇게 쌓았냐며 발로 차서 우르르 무너져내리기도 했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 생각해보기도 했고, 막막한 생각에 너무 슬퍼서 펑펑 울어보기도 했어. 그래도 꿋꿋하게 쌓다 보니까 한 명 한 명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가 쌓은 담을 바라봐주더라고. 잘 쌓았다며 칭찬을 한 사람도 있었고,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예쁘겠다며 나와 함께 담의 계획을 도란도란 이야기할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어. 


여튼, 그렇게 꽤 두터운 담을 쌓았는데, 뒤쪽 담벼락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아니 이게 누구야. 나에게 늘 칭찬해주던 당신이 아니겠어. 너무 반가운 마음에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 쌓아왔는지 보여주며 자랑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다짜고짜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렇게 길게만 쌓아서 어떡할 거냐고. 다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래. 어떡하지. 나 그래도 그동안 잘해온 줄 알았는데. 당신이 없어도 잘해온 줄 알았는데. 다 부숴버리라니. 내가 그동안 쌓아온 건데 어쩜 그렇게 무심하게 말할 수가 있는 건지.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도 덩달아 화를 냈어. 갑자기 사라진 주제에. 당신이 뭘 알아. 말을 하다 보니까 화가 더 쌓이는 거야. 서로 입에 담기 힘든 말까지 섞으며 싸웠어. 


정말 긴 시간 동안 싸웠던 것 같아. 근데 계속 화를 내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한가지 제안을 했어. '내가 담의 일부분을 부술게요. 우선 여기로 넘어와 주시겠어요? 이곳의 담을 본 후에 우리 다시 이야기해보기로 해요.' 처음엔 다 부숴버리라던 당신이 잠잠해졌어. 이내 당신은 수긍했고, 난 힘들게 쌓았던 담의 일부분을 망치로 부쉈지. 우르르르르. 정말 힘들게 쌓았던 건데, 부술 때는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게 참 슬픈 거 있지. 먼지를 가르며 당신이 내 쪽으로 넘어왔어. ‘나 이만큼이나 쌓았어요. 여기 서 있으면 끝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길어요. 여기는 이 색으로, 저기는 저 색으로 칠했어요. 여기는 누가 도와줬고, 여기 앞에는 꽃도 심어봤어요. 그래도 예쁘게 잘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다 부수라고 하면 내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말하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 왜 내 마음을 이해 못 할까 하면서. 근데 씩씩대고 내 편으로 넘어온 당신도 펑펑 우는 거야. 미안하대. 그러면서 자신의 쪽의 담벼락을 보여주는 거야. 나도 반대편으로 넘어가 보았어. 허허벌판에 오래된 돌무더기가 흩날리는 곳. 내 쪽은 참 알록달록 예쁘기도 한데. 싸늘한 바람에 가슴이 아파 나도 함께 울었어.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 황량한 쪽을 나도 함께 채워줄 수 있을까요?


아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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